** 우묵배미의 사랑(A Short Love Affair, 1990) - 감독 장선우 **

-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는 네 울움.(신경림 ‘가난한 사랑 노래’)

‘일도’는 빠듯한 살림을 꾸리며 미싱사로 일합니다. 어느 날 공장에 ‘공례’가 들어오고 그들은 변두리의 샛길로 빠져듭니다. 일도는 무료한 일상과 억센 아내가 지겨웠고, 공례는 매일같이 남편에게 매 맞는 일에 지쳤거든요. 일도는 공례에게 남몰래 사랑의 사인을 보냅니다. 백묵으로 ‘8과 1/2’이라고 쓰고, 물 묻힌 손으로 탁자 위에 ‘비닐하우스’라고 적습니다. 그에게 그녀는 ‘진흙에서 피어난 연꽃’ 같았지요. 그녀 또한 일도와 하룻밤을 보낸 날 그의 흰 양말을 정성스레 빨래합니다. 무릇 사랑은 손에서 피어나는 거니까요.

원작소설 ‘왕룽일가’에서 ‘우묵배미’는 “서울시청 건너편 ‘삼성’ 본관 앞에서 999번 입석을 타고 신촌, 수색을 거쳐 50분쯤 달려와 낭곡 종점”이라고 묘사되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우묵배미는 그저 서울에서 밀려난 사람들과 본래 그곳에 머물던 사람들이 혼재하는 변두리 동네일 뿐이지요. 봉제 공장의 미싱 돌아가는 소리는 끊이지 않고, 여기저기에서 몰려든 아주머니들은 너나없이 실밥을 뜯습니다. 오래된 카세트에서는 뽕짝이 흘러나오고 밖은 거나한 술판이 벌어졌으니, 이곳에서 사랑은 살아가는 일의 다름 아닙니다.

마지막 시퀀스에서 일도는 다시 비닐하우스에 있습니다. 진흙밭에서 터덜터덜 나오며 공례를 생각합니다. 다른 여자와 불륜을 저지르고 하얗게 핀 연꽃을 떠올립니다. 사랑을 쓰려면 지우개로 지울 수 있게 연필로 써야겠지요. 연필은 써도 써도 닳지 않고, 가난은 미싱처럼 반복되며, 인생은 고장 난 카세트에서 흘러나오는 오랜 유행가니까요.

서울아트시네마 극장에서 오는 9월8일부터 19일까지 ‘장선우 특별전’이 상영됩니다.

권선혜 book@j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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